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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리의 비도 오고 그래서] 올여름의 우울과 공포를 기억하라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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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리 ㅣ 사회정책부 기후변화팀 기자 덴마크 영화감독 라스 폰 트리에의 <멜랑콜리아>는 종말을 앞둔 지구인의 불안과 우울을 그렸다. 행성이 지구를 향해 돌진해오는 마지막 날을 앞두고 있다. 이때 사람들은 서로 다른 모습을 보인다. 누구는 지구의 모든 생명은 곧 사라지게 된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며 ‘정신승리’를 추구한다. 누구는 피할 수 없는 죽음 앞에 극도의 불안감을 느낀다. 우울증을 앓는 저스틴은 파멸의 순간을 앞에 두고도 서늘하고 평온한 표정을 유지한다. 저스틴을 연기한 미국 배우 커스틴 던스트는 이 영화로 2011년 칸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는데, 미래에 대한 기대를 접어버린 우울한 현대인이 지구 종말을 마주할 때 꼭 저스틴과 같은 표정을 짓지 않을까 싶었다. 최근 이 영화를 다시 떠올린 이유는 유독 길었던 올여름의 장마와 폭우 때문이다. 기상청 통계 결과 올해 제주와 중부지방의 장마는 49일과 54일간 이어졌다. 1973년 집계 이래 최장 기록이다. 남부지방도 38일로 평년(32일)보다 길었다. 지난 3년 동안 폭염(2018년), 태풍(2019년), 폭우까지 지구가 매해 새로운 목소리로 인간을 향해 분노하고 있는데, 이러다가는 조만간 지구가 우리와 ‘손절’할 것만 같은 위기감이 든다. 장시간 많은 양의 비가 내린 올여름엔 평소와 다른 다양한 감정을 경험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여름에 달궈진 대지를 식혀주는 비가 내리면 처음에는 기분이 상쾌해진다. 그러다 쉬지 않고 비가 계속 내리면 우울해진다. 여름이어도 동절기 수준으로 햇빛의 양이 줄어들면 기쁨을 느끼는 세로토닌 호르몬도 줄어들기 때문이다. 가을·겨울이 어둡고 습한 영국 런던에서 14년째 살고 있는 친구는 한 해의 절반 동안을 밝고 따뜻한 나라로의 여행 계획을 세우며 우울함을 이겨내고 있다. 종종 공포심을 느낄 수도 있다. 2017년 11월 런던으로 떠났던 일주일간의 출장 내내 여우비(태양이 뜬 상태에서 내리는 비), 보슬비, 장대비 등 각종 비가 왔다. 촉촉하고 차분했던 런던의 첫 느낌은 서서히 사라졌다. 런던의 늦가을은 오후 3시만 되면 사위가 어두워졌는데, 머릿속을 잔뜩 채운 온갖 걱정들이 심장을 조여와 숨을 쉬기 힘들었다. 일정만 마치고 바로 좁은 호텔 방으로 돌아와서는 ‘무사히 인천공항까지만 갈 수 있다면 다시 성당에 다니겠다’고 기도만 했다. (한국에 돌아와 런던에서 내가 일종의 공황장애를 경험했다는 진단을 받았는데, 모든 정신질환이 그렇듯 이유는 불분명하다.) 집중호우가 나날이 이어졌던 이달 초 새벽에도 누가 창밖을 돌로 때리는 듯한 빗소리에 잠 못 이룬 이들이 많다. 유엔 정부간기후변화위원회(IPCC)는 기후변화가 심해지면 심리적 문제로 고통받는 이들이 늘어날 것이라고 강조했다. 산사태·홍수 등 직접적 재난으로 인한 트라우마뿐 아니라 기후 우울증(climate depression)을 앓는 이들은 이미 이런 위협을 체감하고 있다. 이들은 겨울철과 장마철이면 ‘라이트 테라피’를 받아야만 하루를 버텨낸다. 비가 자주 오는 영국과 일본 기상청은 이들을 위해 우울해지기 쉬운 날씨를 미리 경고하는 이메일이나 문자 알림 서비스를 제공한다. 기후위기 문제가 심해지면 한국 기상청도 이런 정보 제공을 요구받을 수 있다. 이상 기후로 인해 무너지는 ‘마음 건강’을 지켜야 하는 시대가 왔다. 그 시작은 올여름 감정 변화를 기억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평생 일군 삶의 모든 것이 물에 잠긴 뉴스가 이어질 때 우울했고 두려웠다면, 전국민이 왜 이런 감정에 휩싸였는지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저스틴처럼 지구로 돌진하는 행성을 바라만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ecowoori@hani.co.kr



August 23, 2020 at 02:54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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