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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멀피플] 우석영의 동물+지구 미술관
34. 펠릭스 밸루통, 파울 클레, 노을
태양 광선이 대기층을 통과하는 거리가 늘어나는 시간대(새벽, 아침, 저녁)가 찾아오면, 파장이 짧은 파랑 계열의 태양 광선은 공중에서 흩어진다. 하지만 파장이 긴 빨강 계열의 녀석들은 고스란히 살아남아 우리 앞에 나타난다. 게티이미지뱅크
태양 광선이 대기층을 통과하는 거리가 늘어나는 시간대(새벽, 아침, 저녁)가 찾아오면, 파장이 짧은 파랑 계열의 태양 광선은 공중에서 흩어진다. 하지만 파장이 긴 빨강 계열의 녀석들은 고스란히 살아남아 우리 앞에 나타난다. 게티이미지뱅크
‘자연의 색깔’(야나 세들라치코바, 슈테판카 세카니노바 글, 막달레나 코네치나 그림, 그린북, 2020)의 저자들은 이 세상을 색다르게 본다. 오직 색이라는 프리즘으로만 이 세상의 자연물을 계열화해서 보는 과단성을 발휘하는 것이다. 이들은 광물과 풀꽃과 열매를, 새와 곤충과 다른 동물을 하나의 범주로 묶어버린다. 그러니까 ‘빨강’ 항목에서 독자는 루비와 벽옥, 크랜베리와 개양귀비, 광대버섯과 마가목, 미국 지빠귀와 해변말미잘을 단 몇 초 안에 일별하며 이들을 하나의 가족으로 보게 된다. 이 시각적 경험은 분명 유쾌한 경험이다. 기성의 인식틀을 벗어나는 경험 자체가 즐거운 경험이 아니던가. ‘자연의 색깔’을 만든 이들은 해(태양)를 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들은 ‘빨강’ 항목에 ‘새벽 구름’을 집어넣는 재치를 보였다. 태양 광선이 대기층을 통과하는 거리가 늘어나는 시간대(새벽, 아침, 저녁)가 찾아오면, 파장이 짧은 파랑 계열의 태양 광선은 공중에서 흩어진다. 하지만 파장이 긴 빨강 계열의 녀석들은 고스란히 살아남아 우리 앞에 나타난다. 우리가 태양을 바라보게 되는 것은 대개는 이 붉은 계열 빛들의 생존 현상, 즉 노을 덕분이다.
석양, 펠릭스 발로통, 1913년
석양, 펠릭스 발로통, 1913년
노을 앞에서 나는 붙들릴 때가 많다. 노을 앞의 이 멈춤과 바라봄은 나를 어떤 묘한 행복감으로 몰고 가는데, 이 행복감은 기성의 인식틀을 벗어나는 즐거움에서 발원한다. 노을은 내가 디디고 있는 이 땅이 해모수의 자손들에게 귀속된 땅만이 아니라 태양의 구속력을 받으며 자기만의 여행을 계속하고 있는 지구의 한구석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돌연 환기하기 때문이다. 나무, 철새처럼 노을은 지구를 인식하게 해주는 중요한 시각자료임이 분명하다. 노을을 보며 잠시 묵상에 젖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별 볼 일 없는 우리의 하루하루가 태양-지구의 지속적 운동이라는 뒤흔들 수 없는 근본 질서 속에서 유지되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을지 모른다. 이 삶과 욕망, 성취와 좌절은 그저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취업과 연봉, 축배와 고배, 그것만이 인생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그것 말고, 그것 너머에 무언가가 더 있다. _______
노을, 가장 성스러운 자연현상
1913년에 스위스 태생 화가 펠릭스 밸루통(Felix Vallotton, 1865~1925)이 그린 노을 그림들(작품 제목은 ‘석양’(Sunset)이다) 역시 실제 노을처럼, 보는 우리로 하여금 태양-지구라는 근본 질서를 생각하게 한다. 밸루통의 노을 작품들은 고요하고 묵중하다. 그래서 보는 우리 자신을 더 고요하고 무겁게 해준다. 이때 우리 자신의 표현물, 우리 자신의 한 단면에 불과하지만 우리 전체를 대표하는 것은 바로 침묵이다. 이 침묵은, 오직 변화와 발전, 전진만을 의미하는 현대의 시간에서 ‘다른 시간’으로 우리가 빠져나오고 있음을 시사한다. 새롭게 빠져들어 간 다른 시간에서, 그러니까 우리는 자연물의 “실체적 토대”(막스 피카르트) 같은 것을 알아본다. 이 토대는 인류가 빚어온 역사의 너머에서부터 역사의 무대 안으로 온 것이다.
석양, 펠릭스 발로통, 1913년
석양, 펠릭스 발로통, 1913년
그렇기에 이것은 지구적·우주적 무한에 닿아 있다. 무한에 닿은 자연물 앞에서, 죽음으로 향해가는 우리는 겸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오만한 우리 자신을 무릎 꿇게 만드는 힘이 밸루통의 작품 안에는, 또 그가 캔버스를 앞에 두고 바라보았을 노을에는 있다. 그러나 파울 클레(Paul Klee, 1879~1940)가 그린 노을에 비하면 밸루통의 노을은 우리네 삶의 현장에서 너무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클레는 ‘도시의 석양’(Sunset in the City, 1922)에서 해변에나 어울릴 노을을 도시로 끌고 왔다. 벨루통과 고국이 같은 이 화가는 담대하게도 세속의 악취가 가장 지독할 공간에, 지상에서 가장 성스러운 느낌을 주는 자연현상일 노을을 병치(竝置)했다. 고단한 일상을 살아내느라 지친 마음 한구석 어딘가에는 살아 있을 소생의 힘처럼, 협잡과 위선, 굴종시키려는 힘과 굴종하는 무기력이 초고속으로 교통하고 있을 최첨단의 도시에도 노을은, 안식의 원천으로서, 깃들어 있다.
도시의 석양, 파울 클레, 1922년
도시의 석양, 파울 클레, 1922년
하지만 노을로 상징되고 노을로 자신을 드러내는 태양은, 도시의 외부자가 아니다. 태양은 도시 외부에서 도시를 관찰하고 있거나 도시 외부에서 도시인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태양은 도시와 도시의 삶, 그 궁극적 근거점이다. 1922년에도, 그로부터 근 백년이 지난 지금의 시점에서도 태양(일몰과 일출)은 노동 시간과 휴식 시간의 기준점이고, 삶을 지속시키는 에너지(석유, 석탄, 천연가스, 태양광, 풍력, 광합성으로 나오는 양분, 그 모든 것)가 솟아나는 원천이 아니던가. 태곳적에도 지금도 우리는 태양의 힘 아래 함께 묶여, 태양의 힘에 기대며 살아가고 있는 공동운명체다. 도시의 빌딩 외면에 얼룩처럼 붙어 있는 클레의 노을은 이런 것을 생각하게 한다. 클레가 사망한 지 60년 후 발표된 지구 헌장(Earth Charter)에는 이런 생각이 담겨 있다. “삶과 문화의 다양성 속에서도, 우리는 공동의 운명을 지닌 하나의 가족이며 하나의 지구공동체다.” _______
당신은 우주 안에서 가치 있는 존재인가
하지만, 정말 그런가? 클레가 그린 도시의 노을은 삶을 살아가는 의미의 준거가 (가족이나 지역, 국가 같은 것이 아니라) 지구와 우주 자체에 있어야 한다는 토마스 베리(Thomas Berry)의 말도 떠올리게 한다. 언뜻 듣기에 토마스 베리가 남긴 이 말은 지구 헌장의 문구보다 더 거창하고, 더 공허하게 들린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픈 걸까? 우선, 베리는 우주 안에 무용한 존재(자)는 없다고 단언한다. 우리의 눈에 버러지보다 못해 보이는 인간도, 버러지보다 하찮아 보이는 생물도, 아니 바위나 모래 같은 것들도 우주 안에서는 저마다의 쓸모가 있고, 우주 안에서 특정한 기능을 하고 있는 존재(자)라는 말이다. 나아가, 인간의 모든 사업은 사업주나 노동자, 소비자, 지역, 국가, 인류사회에 가치 있는 정도를 넘어서 우주에 가치 있어야만 참으로 가치 있다고 베리는 말한다.
6개월을 넘도록 인류사회를 무차별 ‘순회’ 중인 19년형 코로나바이러스는 어쩌면 인간과 지구와의 상호성을, 경제와 문명의 절대 지반인 지구라는 실체를 인간에게 ‘쓴맛’으로 가르쳐 주고 있는 지구의 전령(messenger)인지도 모른다. 게티이미지뱅크
6개월을 넘도록 인류사회를 무차별 ‘순회’ 중인 19년형 코로나바이러스는 어쩌면 인간과 지구와의 상호성을, 경제와 문명의 절대 지반인 지구라는 실체를 인간에게 ‘쓴맛’으로 가르쳐 주고 있는 지구의 전령(messenger)인지도 모른다. 게티이미지뱅크
이런 시각에서 보면, 예컨대 삼성의 새 스마트폰 ‘갤럭시 S20’은 이것의 소비자나 ‘삼성 가족’ 또는 한국이나 인류사회에 도움이 된다고 해서 곧바로 가치 있는 게 아니다. 만일 어떤 사업이 우주 안에서 특정한 기능을 하는 다른 존재(자)(예컨대 어떤 하청 노동자, 생물, 생태계)를 철저히 짓밟으면서 성공적이라면, 그것은 결코 가치 있는 사업으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 베리가 보기에 중요한 건, 우주 안의 여러 주체들과 우리 자신(개인, 사업 주체)이 나누는 친밀감의 정도이다. 이런 의미에서, 베리는 우리 자신이 (우리가 귀속되어 있는) 우주와 일치하는 만큼만, 우리와 다른 주체 간의 친밀감의 농도가 농밀한 만큼만, 꼭 그만큼만 우리 자신으로 실현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사업은 이런 의미의 자기실현이어야만 한다. 같은 맥락에서, 토마스 베리는 20세기와 21세기 환경 문제(지구생태계 파괴 문제)의 뿌리가 인간의 ‘인식 능력 퇴화’에 있다고 보았다. 첨단 문명을 이룩했지만, 여전히 인간은 지구의 자연계 안에서 삶을 꾸려가고 있고, 지구와 상호성(상호연결성, 상호작용성)을 가진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게 된 사태가 결정적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환경 문제가 문화적 질병이라고 말한다.(토마스 베리, 박만 옮김, ‘황혼의 사색’, 한국기독교연구소) 6개월을 넘도록 인류사회를 무차별 ‘순회’ 중인 19년형 코로나바이러스는 어쩌면 인간과 지구와의 상호성을, 경제와 문명의 절대 지반인 지구라는 실체를 인간에게 ‘쓴맛’으로 가르쳐 주고 있는 지구의 전령(messenger)인지도 모른다. 다른 식이 아니라면 이런 식이라도 인식하고 자각하라는 무언가의 목소리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깨닫고 배우기 좋은 장소는 진료소나 병상이 아니라 교실이다. 펠릭스 벨루통이나 파울 클레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미술관도 하나의 교실이겠지만, 2020년 7월 어느 날 저녁 하염없이 노을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든 그곳도 우리에게는 하나의 교실이다. 우석영 환경철학 연구자·작가



July 10, 2020 at 08:42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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